* 02년 2학기 '한국근현대사' 보고서..원문작성일 02.10.08...
내가 쓴 게 아니다..1년 선배가 쓴 듯..20~21살 새내기들이 쓴 티가 난다...
1.우리는 왜 금정굴을 답사하였는가
우리 조에는 일본에서 교환 학생으로 온 일본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수성을 살려서,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한-일 두 나라가 관련 돼 있는 어느 역사적 사실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제암리’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제암리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던 중, 그와 유사한 다른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머지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6.25 전쟁을 중심으로 학살당한 것이었다. 제암리, 거창, 노근리 등 우리가 익히 들어온 지역뿐만 아니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역에서도 무수히 많은 학살 만행이 자행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끈 지역은 바로 경기도 고양시의 ‘금정굴’ 이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숲 속에 자리 잡은 이 폐광에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가해자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른 양민 학살 지역의 경우 대다수의 가해자가 북한군, 일본군 혹은 미군인데 비해 우리가 조사한 바 이 지역의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한 가해자는 바로 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인권 신장을 위한 사회적 목소리가 점점 높아만 가고 있고 이에 따라 일제 치하와 전쟁 당시 북한군, 미군,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 학살이 공론화, 쟁점화 되어 그 유가족 보장 문제와 위령탑 건설 등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성격상 다른 학살 사건들보다도 더 신중하게, 그리고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금정굴 사건이 문민 정부 이후에도 공론화 되지 못하고, 계속 ‘그들만의 문제’로 남아 사회적 음지를 맴돌고 있다. 이에 우리 조는 궁금증을 안고 답사지를 금정굴로 정하고 여기에 얽힌 진실과 숨겨진 의혹, 그리도 전 후 50년 간 우리나라를 옭아맸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폐해와 그 잔재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2.사건의 개요
금정굴 사건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수복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정부와 경찰 -여기에 태극단이라는 반공단체까지 가세한다- 은 다시 부역자 색출과 그들의 처단을 시행하는데, 적극적 좌익 활동가들이 인민군과 함께 북한으로 올라가 버린 그 상황에서 대상은 결국 반강제적으로 가입한 보도연맹 회원이거나 소극적 부역자들, 또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었다.
9.28 수복 직후 약 1개월 반 동안 경찰의 주도 하에서 진행된 치안대와 우익단체의 부역자 색출과 처단 작업은 법적 절차를 지키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결 처분 등의 형식으로 불법적으로 자행된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백명의 양민들은 깊게 파인 수직 금광인 금정굴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서 반세기가 넘도록 묻혀 있게 된다. 집과 일터, 길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서울에 가 있는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와서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무고한 사람들의 유족들은 그들의 주검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Red Complex에 시달리며 타는 가슴을 움켜쥐며 살아야만 했다.
같은 민족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두 편으로 갈라져 대립하면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밝히려면 민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고 숨기려면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걸리는 복잡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우익과 좌익이 나뉘어져서 다투는 양상으로 지속되고 있고, 이는 금정굴의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고자 하는 위령탑의 건립마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3.답사 일정
<답사 일:2002년 10월 3일.>
그리 나쁘지 않은 날씨의 10월 3일. 개천절이기도 한 이 날에, 한국근현대사 16조 조원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더욱 잘 알 수 있는 답사를 충실히 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품고(!) 하나 둘 학교 정문에 모였다. 약속시간인 9시 30분이 되어서, 학교 앞 버스정류소에서 77번 시외버스를 타고 우리들은 고양 금정굴로 향했다. 지하철을 이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조사해 본 결과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에 내리게 되는 역(정발산역)에 바로 가는 시외버스(77번)이 있었기에 시외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앉아서 가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정발산역 건너편의 일산구청 앞에 내린 시간은 10시 40분. 깨끗하게 꾸며진 일산구청의 모습에 다들 한번씩 감탄을 하고 나서, 금정굴 쪽으로 향하는 마을버스(9번)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마을버스 기사분이 굉장히 불친절한 것이었다. 마을버스라면 그 지역의 얼굴과도 같은 교통수단인데, 그 마을버스의 기사분이 우리가 조심스레 물어본 “금정굴에 가려면 이 버스를 타야 하느냐”는 질문에 퉁명스럽게 “모른다. 탈거면 빨리 타고 안탈거면 내려라. 시간 없다”라고 불친절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심기가 불편했다. (답사가 수월하지 않으리라는 복선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결국 내릴때까지 투덜대고 있었다.
결국 미리 조사해 간 자료에 의존해 내린 곳은 탄현큰마을. (10시 55분) 그곳에서 금정굴까지 걸어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택시를 잡기 전에, 확인차 그 곳에 계신 주민분들에게 금정굴을 물어 보았는데, 하나같이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금정굴이 이렇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택시에 탑승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발생했다. 택시기사분도 금정굴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표식으로 제시된 건너편 주유소를 말씀드리고서야 택시는 금정굴로 향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11시 10분. “금정굴”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산 아래에 도착했다. 다소 단촐한 모습의 입구에 약간은 의아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금정굴 사건은 아직도 국회와 시청 등에서 보류되고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시설도 갖추지 못할 정도라니... 약간은 씁쓸한 마음을 가진 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금정굴 현장은 생각보다 매우 가까웠다. 그리고 또, 산아래 입구에서 느낀 씁쓸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여기가 과연 답사지가 맞는걸까’ 라는 의구심과 함께 안타까움이 솟아올랐다. 판자집으로 된 사무소와, 제대로 된 탑 하나 없는 현장. 그리고 푸른색 비닐로 덮여 있는 금정굴의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마침 우리가 간 날에 현장 정비와 신목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우리들도 팔을 걷어 부치고 (밥값을 해야 한다는 협박성 말씀도 일조를 했다;;;) 일을 돕기로 하였다.
총무님과 사무실 바깥벽에 붙어 있는 발굴 사진들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현장 정비와 신목 세우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옮기는 데 우리도 참여했다. (1차로는 통나무...) 12시가 약간 넘어가는 시간까지 일을 해서 통나무를 모두 옮기고 나서, 그곳에 계신 분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염치 불구하고~) 식사 자리에서 우리는 못 다한 인사를 다 나누었고, 식사는 약 1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비빔밥을 먹었는데 솔직히, 풀밥이었다. 그릇은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13시. 다시 금정굴 현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더욱 혹독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신목을 세운 다음 고정하기 위해 사용할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기 시작했는데, 모래주머니가 통나무보다 더 무거웠다;;; 그래도 밥까지 먹고서 안 할 수는 없다! 라는 오기로 운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신 영광의 상처가 팔에 남았다. 일 했다는 증거...)
드디어 신목을 세우는 순간! 모두 신목에 달려들어 구호에 맞춰 밀어 올리자, “산 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라는 제목의 신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제목은 금정굴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외치고 있는 느낌을 주어서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신목이 세워지고, 시멘트가 부어질 동안 우리는 유족회 회장님과 인터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회장님의 힘들었던 과거사를 들으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회장님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회장님과 약 40분정도 인터뷰를 하고, 다음으로 시민단체의 위원장님과 다시 인터뷰를 시작했다. 시민단체를 운영하시면서 유족도 아닌데 금정굴 사건에 발벗고 나선 회장님은 존경받기에 충분한 분이셨다. 위원장님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많이 말씀해 주셨다.
인터뷰 일정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근처에 태극단 묘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태극단이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다. 즉석에서 조원들과 의논한 결과, 돌아가는 길에 태극단 묘지에 들르기로 하였다.
15시 30분, 금정굴 현장 정리가 마무리되고 나서, 우리는 태극단 묘지로 이동하고자 택시를 잡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택시가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약 30분가량을 계속 걸어갔다.) 택시를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걸어가던 우리를 구한 사람은 다름아닌 위원장님이었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차로 태극단 묘지까지 태워주기까지 하셨다. (구세주...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16시 10분. 태극단 묘지 앞에 내리자,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가 과연 묘지인가. 저택의 정원처럼 넓고 잘 가꿔진 묘지는 금정굴 현장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많은 분묘들 옆에는 탑까지 세워져 있었다. 금정굴 유족들이 그렇게 세우고 싶어도 세우지 못하는 위령탑이 문득 생각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태극단 묘지를 둘러보고 나서,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며 신촌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현역으로 향했다. 마침 길 건너편이 역이었기에, 통일호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기차를 기다리며 약간의 식사를 한 후 우리는 통일호에 올랐다. 그리고 통일호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며 40분동안 서서 신촌역까지 이동했다.
<답사일정 Summary>
9시 30분 신촌 출발 -> 10시 40분 일산구청앞 도착 -> 10시 55분 탄현큰마을 도착 -> 11시 10분 금정굴 앞 도착 -> 12시까지 면담 및 자원봉사 -> 13시까지 점심식사 -> 14시까지 더욱 혹독한 자원봉사 -> 14시 40분까지 유족회 회장님과 인터뷰 -> 15시 30분까지 시민단체 위원장님과 인터뷰 -> 15시 30분. 금정굴 출발 -> 16시. 시민단체 위원장님에 의해 구조 -> 16시 10분. 태극단 묘지 도착 -> 17시까지 태극단 묘지 답사 -> 17시 10분. 탄현역에 도착 -> 18시. 신촌 도착.
4.사건의 원인
우리가 인터뷰와 사전 조사를 통해 알아낸 금정굴 양민 학살의 주요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사회주의, 혹은 좌익을 마음 속으로 선호하고 있었다. 미국과 우익 집단들은 국민의 이러한 이념적 선호도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극우 반공 체제를 굳히기 위해 잠재적으로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객관적 사상의 검증도 없이 처단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위와 같은 시대적 상황은 당시 경기도 고양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금정굴 사건의 주 가해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 태극단의 보복
태극단은 1950년 7월 5일 당시 고양군 중면 일산리에서 이장복, 안영근, 홍원식 등이 모여 조직한 반공 청년 단체였다. 이들은 20대를 주축으로 구성되었고 6.25 전쟁 후 서울이 인민군의 통치 하에 있을 때 서울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우익 비밀 집단이다. 하지만 국군의 9.28 수복을 며칠 앞두고 인민군의 내무성을 습격하려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40여명의 태극단 단원들이 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태극단은 더욱 더 강한 우익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문제는,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에 부역한 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이들이 색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적극적 부역자(그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 월북 한 상태였다)라기 보다는 소극적 부역자였고, 무고한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 하나로 무참히 학살했다. 이는 감정 대립으로 인한 필요 이상의, 이성을 상실한 보복행위임이 분명하다.
2) 당시 이무영 경찰 서장의 개인적 감정
서울 수복 이후 고양 경찰 서장으로 부임한 이무영 서장은 이전에 김포에서 경찰 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자신의 친지와 가족이 인민군에게 학살을 당해 그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 의해 고양에서 인민군에게 부역했던 자들을 색출하고 처형했다. 그는 경찰력과 당시 마을의 30, 40 대 우익 단체원 구성된 치안대를 총 동원하여 인민군의 서울 통치 시 부역을 했던 사람들을 이를 잡듯이 찾아냈고, 심지어는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고양시를 떠나 먼 지방에 피신했던 사람들도 잡아내었다. 당시에 그는 직접 총을 쏴서 소극적 부역자들과 무고한 양민들을 처형할 정도로 개인적인 감정이 심각하게 격해져 있었다.
즉 금정굴 사건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라 개인과 몇몇 단체의 감정에 의해 저질러진, 사상의 대립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자행된 보복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5.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
1)같은 민족(특히 남한)에 의한 양민 학살
한국전쟁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는 틀에 박힌 정답이 있어 왔다. 곧, 전쟁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고 전쟁에 관련된 모든 잘못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그리고 남한은 희생자에 불과하고 미군과 남한 군은 거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답이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전쟁 중 미군이 저지른 과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남한’이 저지른 과오는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이었으며 함부로 언급해서도 안 되는 금기였다. 비록 금정굴 사건과 같이 남한에 의해 자행된 양민 학살 사건도 존재했지만 국가는 진실을 애써 외면, 은폐하려 했고 따라서 한국 전쟁에 관한 역사는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였다.
그 이유는 국가 탄생의 축이, 국가 탄생의 정통성이 위기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지지 기반이 빈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전후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 ‘빨갱이’ 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사람을 색출, 처단하여 정권 기반을 강화하였고 분단을 고착화하였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의 시체와 그들이 흘린 피 위에 세운 정권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경우 정권 자체의 정통성이 흔들릴 것을 염려한 그는 사실과 진실의 은폐와 왜곡에 나섰다. 그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도 이러한 행위는 계속 되었다. 대신 다른 민족에 의해 자행된 양민 학살 사건은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하였다.
2) 반공 이데올로기
전 후 50년 간 국가적 목표는 국가 경제 재건과 국가 안보였다. 1인 군부 독재 시절 내내 간헐적으로 국민의 민주화로의 열망이 비쳐졌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다는 미명 하에 묵살되고 짓밟혀졌다. 더군다나 반공 이데올로기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칼날을 적에게 휘두를 당위성과 정당성을 부여해 준 좋은 구실이었다.
전쟁 이후에도 끊임없는 전쟁의 공포와 북한의 위협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자연스레 반공 의식을 갖게 되었고 군부 정권의 계획된 강요로 인해 더욱 더 투철해졌다. 국민들은 Red Complex의 마법에 걸린 채 ‘빨갱이’ 하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배척하게 되었다.
당시 군부 독재 정권은 국민들의 이러한 심리를 잘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한에 반하는 일부 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 붙이고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처리’ 하였다.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국민들의 동의와 수긍을 쉽게 얻어냈다.
금정굴 사건만 해도 그렇다. 당시 무수히 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었는데도 가해자측 에서는 ‘좌익 분자 척결’ 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오히려 ‘빨갱이’들을 처형한 가해자들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치켜세웠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유족들은 사건의 진실과 흑막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가족’ 이라는 사회적 천벌에 의해 낙인찍히고, 탄압과 갖은 불이익으로 인해 지난 50년간 숨죽여 지내올 수밖에 없었다. 4.19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 진상조사단에 의해 민간인 학살 만행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서서히 밝혀졌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법 행위로 검거되었고 침묵을 강요받으며, 진실 또한 은폐되었다. 그 이후 살아남은 대부분의 가족들은 금정굴도 차마 가보지 못한 채 치안대가 무섭고 죽는 것이 두려워 아무 저항 없이 그저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희생자 가족은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가슴속에만 숨겨둔 채 무슨 해를 당하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살아왔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피해 의식과 생존에 대한 본능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로지 침묵만이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금정굴 사건은 지난 50년 간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는 곳,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기 중의 금기 시 되어 왔다.
6. 사건이 공론화 과정과 공론화 이후의 행보 그리고 문제점
1) 사건 공론화 과정
1990. 6 김양원씨가 향토사 발굴 도중 금정굴의 엄청난 학살 사실을 접하고 조사에 착수, 그후 3년간 가해자, 피해자, 목격자 등을 찾아다니며 탐문, 현장 조사 등을 계속함.
1993. 8. 지역의 5개 단체(고양 시민회, 농민회, 전교조, 항공대학생회, 용마피혁)가 금정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결성을 결의함.
1993. 9. 유족회 구성
1993. 9. 고양시의회장을 방문하여 탄원서를 제출하려 했지만 정종득 의장에게 접수거부 당함
1993. 9. 청원서 제출(대통령, 내무부장관, 고양시장, 고양시의회 의장, 고양경찰서장) 국회 청원서 제출(제1차)
1994. 10 1차 자료집 발간
1995. 9 제 3차 합동 위령제와 함께 유골 발굴 시작 하지만 최초 발굴 시작 중 시청녹지와 공익요원 수명이 작업을 강제로 중지시킴. 강력히 항의하며 발굴 재개
1995. 10 MBC PD 수첩이 금정굴 사건 연속 2회 방영. 진상규명위원장이 CBS 기독교 시사 프로그램에서 금정굴 양민학살에 대해 대담함. 연일 매스컴에 보도됨. 보도를 듣고 유족들이 모이기 시작.
2) 공론화 이후의 행보
1995. 11 서울대 법의학 이윤성 교수께 유골 감정을 의뢰하러 가는 도중 가해자인 고양경찰서를 경유하여 불법 양민학살을 항의하고 유골을 서울대 연구실에 모심. 그 후 유족회의 매월 개최
1996. 4 서울대 이윤성 교수의 유골감정 1차 보고서에서 희생자가 160명 이상이며 어린이 뼈도 있을 것으로 추정
1996. 12 유족회 대표가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를 당사에서 만나 사건을 설명하고 대책을 촉구하여 해결 확답을 받음
1997. 10 경기도의회 본회의에서 금정굴 양민학살 청원심사위원회 구성결의안 채택. 하지만 고양시 출신 신우근 의원의 애매모호한 반박성명으로 좌절됨
1998 11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 추진 위원회 구성
1998. 11 이창복 전국연합 의장을 만나 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들을 소개받고, 유선호 의원을 찾아 청원서 및 특별법 초안 제출
1999. 2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경기도의회에 만장일치로 통과됨
2000. 4 고양시에서 반대자가 있어 주민의견 수렴이 안된고 시에서 위령 사업을 추진할 경우 보훈단체의 반발로 새로운 이념 분쟁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경기도에서 사업시행 불가를 통보
2000. 11 제16대 국회에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청원을 다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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