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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 21세기를 향한 20세기의 절규

lainy 2008. 9. 3. 04:31

* 2007년 2학기 '미국학' 기말발표자료입니다. 글이 조금은 어려울 수 있겠네요..원문 작성일은 07.12.26일 입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세기의 명작 ‘블레이드 러너’, 이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를 살펴보고,. 영화와 사이버펑크,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적-신화적 해석을 밝히고, ‘프랑켄슈타인’ ‘ET’ 등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 비교해보고 영화 속의 일본 이미지에 대해 고찰해 본 후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레플리컨트들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세가지 코드에 대해 알아본다.  

간단한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2019년 로스엔젤레스, 지구 밖에서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복제인간 여섯명이 지구로 잠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만든 회사인 타이렐사에 침입하려다 실패하고, 직원으로 위장한 레플리컨트 한 명이 자신을 색출해내려는 조사관을 살해하게 된다. 이에 경찰은 노련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호출한다. 블레이드러너는 고도의 감정이입과 반응 테스트를 통해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경찰로서, 데커드는 자신의 이런 능력을 이용하여 탈출한 레플리컨트를 하나 둘 씩 사살하게 되고, 남은 레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 타이렐박사를 만나 자신들에게 부여된 4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살해한다. 이에 데커드는 유전과학자 세바스찬의 아파트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 로이와 대결하게 되고 로이는 위기의 순간 오히려 데커드를 구해주고 자신의 수명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데커드는 레이첼과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와 사이버펑크 

사이버펑크라는 말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다. 사이버네틱스는 20세기 들어 새롭게 개척된 학문의 한 영역으로서 한 단위의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의 흐름 및 자동제어를 연구하는 일종의 인공 두뇌학이며, 그 대상은 인간처럼 생물일 수도 있고 컴퓨터처럼 무생물일 수도 있다. 한편 펑크는 기성 세대나 사회 체제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을 일컬을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이렇게 사이버펑크의 의미를 유추해 보면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기술 사회에 이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 및 네트워크 기술이 태동하던 198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서구의 사이버펑크족들은 컴퓨터와 발달된 정보통신체계를 어릴 때부터 일상적인 삶의 환경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세대였다. 그들에게 컴퓨터와의 상호작용은 생활의 일부였으며, 또한 컴퓨터는 실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좌절, 소외, 스트레스들을 해소해주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펑크’라는 말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사이버펑크를 미래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기술을 통한 새로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60년대의 히피, 70년대의 펑크 등의 반문화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재 사이버펑크 영화는 '사이버펑크'가 문화전반에 미친 영향력에서처럼 단순히 컴퓨터나 사이버스페이스에 국한하지 않고,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끝없는 물음으로 그 영역을 확대, 발전시키고 있다 영화 블레이드러너는 20세기 후반 새롭게 대두된 문제들인 후기 자본주의 사회, 기술, 환경 오염, 인간 정체성 문제 등을 다룸으로써 사이버펑크 장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와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포스트'라는 접두어와 '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서 후기산업사회, 소비사회, 다원주의사회로 변해가는 삶의 지평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태동한 사조이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기에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계몽주의적 거대 담론 및 엄숙주의에 대한 회의, 잡종성, 실제와 모사의 구별 없음,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경계의 와해, 탈 중심화, 열림과 자기성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블레이드러너는 사이버펑크 장르에 속하면서 동시에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프레데릭 제임스(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 작품의 중요한 특징으로 패러디(parody)의 기능을 잃어버린 혼성모방(pastiche)의 특징을 가진다고 설명한 바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작품은 과거의 스타일을 모방하지만 비판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혼성모방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영화 블레이드러너 속에서 이러한 혼성모방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외적인 면에서, 주 배경이 되는 2019년, 3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비가 내리는 LA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혼성모방으로 채워져있다. 고딕성당의 첨탑을 닮은 마천루와 신전을 닮은 아파트 등 과거의 낡은 건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서구식 건축에 동양적 모티프를 가미하는 상호문화성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특징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또한 영화 전반에 걸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공존하고, 특정 국가의 특정 장소의 특징이 드러난다기 보다는 뉴욕의 흔적, 홍콩의 모습, 일본의 이미지 등이 뒤섞여있는 모습 등은 포괄적(inclusive)인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여기저기에 흩어진 문화의 혼성모방을 통해 지구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공간 탄생하게 된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혼성모방이 나타난다. 영화 블레이드러너에는 ‘오디이푸스왕’의 부자간의 대립 및 근친상간을, ‘실낙원’의 기독교적 상징성을 ‘프랑켄슈타인’의 과학기술에 대한 경고등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재현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가치들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인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레플리컨트는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원본과 커피의 구분이 없어지는, 장 보드리야르의 모조품(simulacar)과 원본없는 복제(simulation)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의 기독교적, 신화적 해석 

-기독교적 해석- 

앞에서 언급했듯 영화 전반에 걸쳐 기독교적 모티프와 상징, 구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성서보다는 17세기 시인인 밀턴의 ‘실낙원’에서 재현된 성서적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우선, 탈출한 레플리컨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지구로 돌아와 타이렐 회장을 만나는 장면은 ‘실낙원에서’ 제1천사 루시퍼가 신을 거역하고, 지옥에 감금되어있다고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지구로 돌아오는 장면과 유사하다. 여기서는 로이를 루시퍼로, 동료 레플리컨트들은 루시퍼에 동조한 타락천사의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영화 속에서 타이렐 회장은 신에게 도전하고 있는 사탄과 같은 이단으로서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신과 같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싶어하기를 원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신이 인간을 창조하듯, 그 자신도 레플리컨트들을 생산함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 이런 것들은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같은 이단으로서 신에게 도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세 번째. 테카드를 죽음에서 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로이는 오히려 예수와 가까운 존재로 묘사된다. 생명이 다하기 마지막 순간 데커드의 죽음을 막는 것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순교에 비견되며, 화면에서는 마침 성령을 상징하는 동물인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한다. 

네 번째. 성서속에서 아담을 유혹하는 뱀과 이브의 역할을 영화 속에서는 여성 레플리컨트들인 조라, 프릿, 레이첼 등이 맡게된다. 실제로 영화 속 대사에서 클럽의 댄서로 일하는 조라는 ‘타락한 뱀으로부터 쾌락을 이끌어내는 그녀를 보시죠’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다섯 번째. 타이렐 회장이 레플리컨트를 제작하고 4년의 수명을 부여한 것은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고 수명을 부여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신화적 해석- 

영화는 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간단히 말해서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애정의 감정을 느끼면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질투와 혐오를 지니는 경향으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주창된 이론으로, 그리스 신화의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내용이다.  

영화 속에서 레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을 만든 창조주, 즉 아버지 타이렐 회장을 찾아가 그를 살해하게 된다. 이것은 신화 속 부친살해 모티브와 일치하며, 데커드의 경우 그가 레플리컨트가 맞는다는 가정 하에 레이첼과의 관계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면 그는 타이렐 회장의 아들이 되는셈이고, 그 회장에게 부속된 레플리컨트 레이첼은 데커드의 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둘은 데커드의 집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레플리컨트 vs 프랑켄슈타인

한편, 창조자로서 타이렐이 자신이 저버린 창조물, 레플리컨트 로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영화의 모티프는 이미 19세기 ‘메리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보여진 바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취적인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여정의 자궁을 통하지 않고 과학과 기술에 의존해 괴물을 만들게된다. 하지만 그 괴물은 빅터와 가족을 해치며 자신의 짝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고, 빅터가 이를 거절하자 괴물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빅터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약혼녀를 살해하고, 이에 빅터는 괴물을 잡으러 북극까지 그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추위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빙하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소설에서 셀리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통제하지 못하는 남성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연에 속한 생명의 요소들을 조작한 과학 기술의 과신에 대한 위험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자연과 여성의 출산을 대상화시키고 소외시키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런 소설의 구도는 영화 속에서 타이렐과 그의 레플리컨트들에 의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 자신들을 만든 창조주 타이렐의 친구인 눈 제조업자와 기술자 세바스찬을 죽이는 모습과, 수명을 늘려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한 타이렐를 죽이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VS ET 

사실 이런 어둡고 우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린 탓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대단한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에는 <ET>에 밀려 흥행에 실패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그린 블레이드러너와는 달리 따스한 성품의 외계인을 등장시키고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그린 ET의 성공은 1980년대의 어려웠던 미국의 상황과 연관지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1970년 대 말부터 1980년까지 미국의 경제는 최악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었던 1980년대 초 미국은 철강, 전기, 자동차 등의 공업에서 국가경제력 제고와 정보화 사회의 진입이 시작되면서 노조의 영향력을 벗어나 기업의 임의대로 고용을 조정할 수 있는 산업체제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경제적인 격차는 크게 벌어져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이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가 많이 발생하게 된. 이와 더불어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증가 때문에 실제로 체감되는 경기가 굉장히 어려워졌다. 이처럼 절망적인 미국의 상황 속에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황폐하고 절망적으로 그린 영화보다는 따뜻한 미래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 쪽으로 관객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의 일본 이미지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영화 전체에 걸쳐 아시아, 그 중에서도 유달리 일본의 이미지가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국가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이미지가 많이 보이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수많은 SF소설과 영화에서 일본의 이미지는 단골소재로 쓰여왔다. 그도 그럴듯이 80년대에 당시 미국에서는 당시 무서운 기세로 미국 사회를 침투하던 일본의 거대한 자본과 기술력에 대한 일종의 경계가 미국 사회 전체에 퍼져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1980년대 일본경제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수출 호조로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한 일본은 마치 2차 대전의 패배를 분풀이라도 하는 듯 미국 본토를 ‘공습’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본력을 과시하듯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맨해튼 록펠러 센터를 비롯해 수많은 미국 부동산을 사들여 미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에 침공을 당한 당시 미국인들은 굉장히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된다. 2차 대전만 해도 다 무너져내리던 동방의 작은 국가에게 그런 치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80년대 미국영화들에게서 일본자본, 일본기업인, 혹은 일본인에 대해 안좋은 이미지를 품고 있는 영화를 자주 볼 수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어느덧 유명해져버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이라는 문구는 사실, 영화 속의 기업 ‘타이렐사’의 모토이다. 그리고 이 문구는 영화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읇조려지며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것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한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레플리컨트들은 인간과 완벽히 일치하는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유일하게 인간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장면은 타이렐 회장을 죽일 때 나타나는 잔인함과 테커드와의 추격장면에서 보여지는 신체적 월등함 뿐이다.  

-보이트 캠프 테스트-

영화속에서는 외적 차이로 레플리컨트를 구분하는게 불가능하자 ‘보이트캠프’테스트를 실시한다. 이것은 레플리컨트가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즉각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질문을 통해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고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분하는 테스트이다. 하지만 데커드는 최신제품을 검사해달라는 타이렐 회장의 부탁에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이라고 냉소적으로 반문한다. 즉, 기계가 레플리컨트를 식별해내지 못하면 어쩔것이냐 혹은 레플리컨트와 인간의 차이에 대한 어렴풋한 회의의 감정이 드러난 부분이다.  

실제로 영화의 첫부분에 등장하여 테스트를 받은 레플리컨트 레온의 경우 첫부분의 질문에는 무난하게 대답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질문을 받는 순간 조사관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이것은 그의 머릿속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부재로 오는 인간과의 차이이다. 하지만 한층 더 발전한 모델인 레이첼과 같이 기억을 이식받게되면 보이트 캠프 테스트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다움이란, 인간을 인간으로서 있게 하는것- 

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하는 보이트캠프는 기억을 가진 존재인 레이첼로 인해 그 실효성을 상실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구분의 잣대를 친절하게 관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화면 속 레플리컨트에게서 관습적으로 ‘인간’의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사고나 고민, 행동 등을 목격할 때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고뇌, 기억, 인식의 추구, 언어의 사용, 기독교적 희생과 사랑, 이성애적 사랑 등을 행했을 때 레플리컨트와 인간간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느끼게 된다. 즉, 관객들이 인간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특성을 레플리컨트들이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인간적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성의 세가지 코드 ‘기억’ ‘죽음’ ‘사랑’ - 

영화 전체를 통틀어, 영화속 인간들보다 우리는 레플리컨트들에게서 더욱 인간다운 특성들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 인간들은 무미건조하고 감정없는 존재로 비춰지는 반면, 레프리컨트들은 자신들의 유한성을 알고, 시간 속의 존재로서 죽음에 대한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복제인간들은 사랑과 동정, 공감 등의 감정적인 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기억-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자의식을 성립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인간과 레플리컨트를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일순간에 자기자신이 ‘만들어진’자와 시간의 흐름에따라 자신을 ‘만들어온’자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기억이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과 추억이 날조되고 이식된 ‘정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레이첼에게서 기억의 주입 여부, 실재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실재하지도 않고 주입된 기억이지만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다른 레플리컨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 타이렐을 찾아가는 것이나, 로이가 자신의 죽음에 앞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혹은 사진을 모아두는 장면에서 확인 가능하다. 

-죽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어쩌면 인간 수명의 한계성, 즉 죽음일 것이다. 만약 영화 속 레플리컨트들에게 4년이라는 제약된 수명이 부여되지 않았다면, 만약 죽음에 대한 그들의 영화 속 고뇌와 수명을 늘리려는 발버둥이 없었다면 우리는 레플리컨트들에게서 인간성의 핵심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fms다. 인간이 죽음의 시점과 그것을 연장할 방법 등을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플리컨트들은 자신들의 죽음의 시점을 알고싶어하며, 수명연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속 레플리컨트들 역시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낙담하고 분노하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결국은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게 된다.

                                                                        -사랑- 

죽음과 함께 인간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영화에서 레플리컨트들은 재생산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존재하며 이성에 대한 욕망과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된다. 로이와 프리스는 연이관계였고, 프리스의 죽음에 로이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된다. 또한 데커드와 레이첼의 관계는 연인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잣대임을 보여주며, 관객들은 재생산이나 다른 목적을 위한 사랑이 아닌, 서로를 향해 순수한 이성애적 감정을 느끼고 사랑하는 레플리컨트들을 통해 인간과의 구분이 모호해짐을 느낄 수 있다.